우리는 우리 자신의 빈약함을 결코 스스로 깊이 이해하거나 헤아릴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바로 설 수 있는 단 한 곳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입니다. 그곳에 이르렀다면, 이제 우리는 이 내면의 사역 - 중보의 사명 속으로 우리의 전 존재를 기꺼이 부어야 합니다.
우리가 불안에 빠지는 이유는 주님을 고려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와 상의할 때 당황스러움은 사라지게 되고 우리의 유일한 관심은 주님 안에 거하는 것이 됩니다. 그 이유는 주님께는 당황스러움이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 앞에 모든 것을 내어놓으십시오. 고통, 이별, 슬픔을 당할 때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요 14:1)는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예수님과의 우정은 우리 안에 창조된 새 생명 위에 세워지는 것으로서 옛 생명에 대해 아무 애착이 없고 오직 하나님의 생명과만 나누는 것입니다. 그 우정은 말로 다할 수 없을 정도로 겸손하며 조금도 흠 없이 맑고 완벽하게 주님께 헌신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사용하시는 기도의 예화는 선한 것을 구하는 선한 자녀에 대한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에 대해 말할 때 마치 하나님은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에 상관없이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것처럼 말합니다. 결코 당신이 구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는 것이 주의 뜻이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나는 … 그러나 그는”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경험을 한 적이 있습니까? 이 순간이 올 때까지는 나는 성령 세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결코 알지 못합니다. 정말로 나의 모든 것이 완전히 끝나서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바로 거기서 일하기 시작하십니다. 주님은 다른 어떤 사람도 할 수 없는 일들을 하십니다.
내가 복 있는 이유는 나의 가난 때문입니다. 만일 내게 의지력도 없고 드러낼 만한 고상한 성향도 없을 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네가 복이 있도다.” 이는 그 가난을 통해 내가 주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내가 좋은 사람이기 때문에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완전한 가난뱅이기 때문에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완전하도록 온전하게 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주님 안에서 참된 안식을 방해하는 그 어떤 것도 당장 치료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자아의식적 과민성은 무시한다고 치료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감으로 치료됩니다. 만일 우리가 주님께 나아가 ‘자아의식’이 아닌 ‘예수님 의식’을 갖게 해달라고 간구한다면, 주님께서는 그 기도를 응답하셔서 우리로 주님 안에 거하는 것을 배우게 하실 것입니다.
당신은 주님보다는 주님이 무엇을 원하실 것이라는 당신의 ‘생각’에 더 헌신하는 것은 아닙니까? 만일 그렇다면 당신은 당신 속에 슬픔을 자아낼 주님의 거친 말씀을 듣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어렵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성향을 가진 자들에게 주님의 말씀은 쉽습니다.
성령을 소멸시키는 것은 아주 쉽습니다. 주님의 징계를 무시하거나 주님께 꾸지람을 들을 때 낙심해버리면 됩니다. 우리가 얕은 차원의 성화의 경험만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그림자를 실체로 착각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성령이 견책하기 시작하실 때 우리는 “아, 이건 마귀의 일임에 틀림없어”라고 말합니다.
성령의 음성은 미풍처럼 부드러워서 하나님과 완전한 교통 가운데 살지 않으면 결코 그 음성을 들을 수 없습니다. 성령의 가책은 가장 부드럽게 오기 때문에 그분의 음성을 감지할 만큼 예민하지 않으면, 당신은 성령을 소멸할 것이고 영적 생활에 문제가 생길 것입니다. 성령의 가책은 언제나 잔잔하고 조용한 음성으로 오는 작은 소리이기에, 오직 깨어 있는 성도들만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일반적인 지혜는 하나님의 아들에 의해 변화되지 않는 한, 결코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 유한한 몸이 주님께 완전히 굴복하는지, 주님께서 이 몸을 통해 매 순간마다 역사하시는지 살펴야 합니다. 주님의 생명이 매 순간마다 드러날 수 있도록 예수 그리스도께 의존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