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5 "당황케 하는 하나님의 부르심- The Bewildering Call of God" (눅 18)

* 8/5  "당황케 하는 하나님의 부르심- The Bewildering Call of God" (눅 18)

그 이유는 주님의 부르심은 주님의 목적을 위해 그분 자신과 동료가 되도록 부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이 동료로서의 자격 시험은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고 계시는지 하나님이 알고 계신다는 믿음입니다. 이 세상에는 우연히 발생하는 것이 없습니다. 모든 일들이 완전한 하나님의 경륜 가운데서 일어납니다. 하나님은 주의 경륜 가운데 자신의 목적을 이루고 계십니다.

* 8/4 "하나님의 용감한 동료 - The Brave Friendship of God" (눅 18)

* 8/4  "하나님의 용감한 동료 - The Brave Friendship of God" (눅 18)

기독교의 중심은 우리가 하는 ‘일’이 아니라 우리가 유지해야 하는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그 관계에 의해 모든 주변 상황이 바뀝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전부입니다. 우리가 계속적으로 공격을 받아 손상되기 쉬운 것도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8/2 "The Teaching of Adversity - 환난의 훈련" (요 16)

8/2  "The Teaching of Adversity  - 환난의 훈련" (요 16)

신체적으로는 당신이 자신을 소모할수록 지치게 됩니다. 그러나 영적으로는 당신이 자신을 소모할수록 더욱 힘을 얻게 됩니다. 하나님은 결코 내일 또는 다음 시간을 위해 힘을 주지 않으십니다. 단지 그 순간의 긴장을 위해 힘을 주실 뿐입니다. 유혹은 문제를 대할 때 상식으로 대하려 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어려움을 당할 때 큰 기쁨이 넘칩니다. 그 이유는 모든 사람들에게 불가능한 상황이 하나님께는 전혀 문제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7/29 "구름 속에서 예수님이 보이시나요? - Do You See Jesus in Your Clouds?" (계 1)

7/29  "구름 속에서 예수님이 보이시나요? - Do You See Jesus in Your Clouds?" (계 1)

성경에서 구름은 언제나 하나님과 관련됩니다. 구름은 하나님의 통치에 반항하는 듯한 우리 개인 생활의 안팎에서 일어나는 슬픔, 고통, 궁핍의 상황들입니다. 하나님의 영은 이 구름들을 통해 우리에게 어떻게 믿음으로 걸을 수 있는가를 가르치십니다. 만일 구름이 없다면 우리에게 믿음도 없을 것입니다.

7/28 "하나님의 목적인가, 나의 목적인가? - God’s Purpose or Mine?" (막 6)

7/28  "하나님의 목적인가, 나의 목적인가? - God’s Purpose or Mine?" (막 6)

우리가 ‘과정’이라고 부르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목적’이라고 부르십니다. 무엇이 하나님의 목적에 대한 나의 꿈입니까? 그분의 목적은 지금 내가 주님과 주의 능력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만일 요동 속에서 평안하고 당황하지 않을 수 있다면, 그것이 하나님의 목적의 성취입니다.

* 7/27 "지식으로 가는 길 - The Way to Knowledge" (요 7)

* 7/27  "지식으로 가는 길 - The Way to Knowledge" (요 7)

영적인 것을 이해하는 황금률은 지능이 아니라 순종입니다. 사람이 과학적인 지식을 원하면 지적 호기심이 그를 인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만일 그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것을 깨닫고자 한다면 오직 순종을 통해 얻을 수 있습니다. 만일 일들이 내게 힘들어 진다면 이는 분명히 순종하지 않으려는 뭔가가 있어서 그러합니다. 지적 어둠은 무지로부터 옵니다. 그러나 영적 어둠은 내 안에 순종하지 않으려는 뭔가가 있기 때문입니다.

7/26 "정결함으로 가는 길 - The Way to Purity" (마 15)

7/26  "정결함으로 가는 길 - The Way to Purity" (마 15)

내가 악당이라는 사실을 체험해보지 못했다면, 이는 겁 많은 소심함과 문명 생활의 보호 때문입니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 앞에서 벌거벗은 듯이 서게 될 때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간들을 향한 진단이 옳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성령께서 내 안에 들어오시면 그분은 개인의 삶의 중심부에 예수 그리스도의 삶 가운데서 드러나셨던 그 영으로 오시는 것입니다. 곧 성령만이 더러움이 전혀 없으신 완전한 청결이십니다.

7/25 "성령의 폭발적 능력 - Am I Blessed Like This?" (마 5)

7/25  "성령의 폭발적 능력 - Am I Blessed Like This?" (마 5)

산상수훈의 내용을 문자적으로 적용한다면 굳이 우리가 거듭날 필요는 없습니다. 성령께서 주의 말씀을 우리의 상황에 적용하시는 것처럼, 성령에 의해 주의 말씀을 해석하는 것은 성도들이 해야 할 엄중한 작업입니다. 산상수훈은 규범이나 율례가 아닙니다. 성령이 우리의 삶을 인도하실 때, 성령의 폭발적인 능력이 우리 삶에 나타나는 현상들을 진술한 것입니다.

* 7/24 "하나님의 본성과 우리의 동기 - His Nature and Our Motives" (마 5)

* 7/24  "하나님의 본성과 우리의 동기 - His Nature and Our Motives" (마 5)

예수님께서는 그분의 구속을 통해 누구에게든지 자신의 성향을 넣어주실 수 있고, 그를 갓난아기같이 순결하고 단순하게 만드실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순결은 만일 내가 주 안에서 재창조되지 않으면 불가능합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그분의 구속을 통해 착수하신 일입니다.

7/23 "거룩의 신비 - Sanctification (2)"

7/23  "거룩의 신비 - Sanctification (2)"

거룩한 삶의 경이로운 비밀은 예수님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완전함이 나의 부패한 육체를 통해 나타나는 것입니다. 거룩(성화)은 곧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이며, ‘예수님의 놀라운 생명’입니다. 이 생명은 하나님의 은혜의 주권적인 선물인데 믿음을 통해 우리에게 전달됩니다.

7/21 "하나님 왕국으로 들어가는 문 - The Doorway to the Kingdom"

7/21  "하나님 왕국으로 들어가는 문

 - The Doorway to the Kingdom"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이때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네가 복이 있도다.” 이것이 바로 왕국의 입구입니다. 아쉽게도 우리가 가난하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오랜 기간이 걸립니다. 그러나 자신의 가난함에 대한 깨달음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역사하시는 영적 전선으로 우리를 이끌어갑니다.

*** 7/20 "주님앞에서 걷는 삶 Dependent on God’s Presence"

*** 7/20  "주님앞에서 걷는 삶 Dependent on God’s Presence"

실체에 서 있다는 말은 하나님의 임재를 감상적으로 느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의 실체를 믿음으로 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실제로 언제나 그곳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위기의 순간에 필요한 것은 인도하심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때 우리는 잠잠히 주님의 임재를 바라는 가운데 그분의 인도하심을 기다려야 합니다.

**** 7/19 "자발적 순종 - The Submission of the Believer"

7월 “구름 속에서 무엇을 봅니까?”
(슬픔, 고통, 궁핍의 상황들에 휩싸일 때 )


John 13:12-20

요한복음 13:12-20

12 예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신 뒤에, 옷을 입으시고 식탁에 다시 앉으셔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한 일을 알겠느냐?

13 너희가 나를 선생님 또는 주님이라고 부르는데, 그것은 옳은 말이다. 내가 사실로 그러하다.

14 주이며 선생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겨 주었으니, 너희도 서로 남의 발을 씻겨 주어야 한다.

15 내가 너희에게 한 것과 같이, 너희도 이렇게 하라고, 내가 본을 보여 준 것이다.

16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종이 주인보다 높지 않으며, 보냄을 받은 사람이 보낸 사람보다 높지 않다.

17 너희가 이것을 알고 그대로 하면, 복이 있다.

18 나는 너희 모두를 가리켜서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내가 택한 사람들을 안다. 그러나 '㉡내 빵을 먹는 자가 나를 배반하였다' 한 성경 말씀이 이루어질 것이다. / ㉡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나와 함께 빵을 먹은 자가'. 시 35:19; 69:4

19 내가 그 일이 일어나기 전에 너희에게 미리 말하는 것은, 그 일이 일어날 때에, 너희로 하여금 '내가 곧 나'임을 믿게 하려는 것이다.

20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가 보내는 사람을 영접하는 사람은 나를 영접하는 사람이요, 나를 영접하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영접하는 사람이다."


중심 구절 / Key Verses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_요 13:13

You tell me to be a teacher or a teacher, and you're right. I'm like that _ John13:13.

중심 주제 / Key

7/19 "자발적 순종 - The Submission of the Believer"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음성을 듣도록 우리의 마음의 문을 열어 주소서]

주님은 절대로 자신의 권위를 주장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결코 “너는 … 반드시 해야 한다”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완벽하게 자유롭게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들이 그러했던 것같이 그분의 얼굴에 침을 뱉을 수 있을 만큼 자유합니다. 또한 사람들이 그분을 죽였던 것같이 우리도 그분을 죽일 수 있을 만큼 자유합니다. 그래도 주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생명이 주님의 구속에 의해 내 안에 창조되는 즉시 나는 주님의 완전한 권위 아래 있음을 인식하게 됩니다. 이는 도덕적(영적) 통치입니다. “우리 주 하나님이여 … 합당하오니”(계 4:11).

내 안에 있는 가치 없는 것들만이 가치 있는 분께 순복하기를 거부합니다. 만일 내가 자신보다 거룩한 사람을 만났는데 그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고 그를 통해 오는 것들을 순종하지 않는다면 이는 내 안에 가치가 없는 것들이 드러나는 순간들입니다. 하나님은 지적인 면이 아니라 거룩한 면에서 우리보다 조금 나은 자들을 사용해 우리가 주님의 통치하에 들어갈 때까지 우리를 교육하십니다. 그 후 우리의 전반적인 삶의 자세는 주님을 향한 순종으로 일관됩니다.

주님께서 순종을 강요하신다면 그분은 노예 감독자와 같을 것이요 참된 권위를 갖지 못할 것입니다. 주님은 결코 순종을 강요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을 만나뵙게 되면 당장 주께 순종합니다. 우리는 쉽게 주님을 우리의 주인으로 모실 것이며 아침부터 밤까지 주님을 경외하면서 살게 될 것입니다. 내가 은혜 가운데 자라나고 있다는 증거는 나의 순종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진흙탕에 빠져 있는 ‘순종’이란 단어를 살려내야 합니다.

순종은 동등한 관계에서만 가능합니다. 아들과 아버지의 관계에서 참된 순종이 가능한 것이지 주인과 노예의 관계가 되면 참된 순종이란 그 의미가 사라지게 됩니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요 10:30). 그분은 아들이셨지만 고난을 통해 순종을 배우셨습니다. “아들의 순종은 구속주로서의 순종이었습니다.” 아들이 되기 위해 순종한 것이 아니라 ‘아들이기 때문에’ 순종하셨습니다.


말씀과 기도

오늘 읽고 묵상한 말씀을 가지고 당신의 기도문을 작성합니다.
(Take the words you read and reflected on today and write your own prayer.).

*“주님, 하나된 관계 즉 동등한 관계 가운데서 아들 또는 딸이기 때문에 순종게 하소서.”

[나의 기도 - My Pray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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