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 "아버지께서 들으시는 기도 - Prayer in the Father’s Hearing" (요 11)

8/9  "아버지께서 들으시는 기도 - Prayer in the Father’s Hearing" (요 11)

우리의 일반적인 지혜는 하나님의 아들에 의해 변화되지 않는 한, 결코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 유한한 몸이 주님께 완전히 굴복하는지, 주님께서 이 몸을 통해 매 순간마다 역사하시는지 살펴야 합니다. 주님의 생명이 매 순간마다 드러날 수 있도록 예수 그리스도께 의존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8/8 "하나님 아버지를 기리는 기도 - Prayer in the Father’s Honor"

8/8  "하나님 아버지를 기리는 기도 - Prayer in the Father’s Honor"

그렇다면 나는 계속적으로 의아한 마음으로 나의 상식의 삶에 대해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왜 여기서 내가 좌절해야 하지? 내가 아버지의 일로 마음이 사로잡혀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자!” 상황과 상관없이 그 거룩하고 순결하신 영원한 아들께서는 아버지와 연결되어야 합니다.

* 8/5 "당황케 하는 하나님의 부르심- The Bewildering Call of God" (눅 18)

* 8/5  "당황케 하는 하나님의 부르심- The Bewildering Call of God" (눅 18)

그 이유는 주님의 부르심은 주님의 목적을 위해 그분 자신과 동료가 되도록 부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이 동료로서의 자격 시험은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고 계시는지 하나님이 알고 계신다는 믿음입니다. 이 세상에는 우연히 발생하는 것이 없습니다. 모든 일들이 완전한 하나님의 경륜 가운데서 일어납니다. 하나님은 주의 경륜 가운데 자신의 목적을 이루고 계십니다.

* 8/4 "하나님의 용감한 동료 - The Brave Friendship of God" (눅 18)

* 8/4  "하나님의 용감한 동료 - The Brave Friendship of God" (눅 18)

기독교의 중심은 우리가 하는 ‘일’이 아니라 우리가 유지해야 하는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그 관계에 의해 모든 주변 상황이 바뀝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전부입니다. 우리가 계속적으로 공격을 받아 손상되기 쉬운 것도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8/2 "The Teaching of Adversity - 환난의 훈련" (요 16)

8/2  "The Teaching of Adversity  - 환난의 훈련" (요 16)

신체적으로는 당신이 자신을 소모할수록 지치게 됩니다. 그러나 영적으로는 당신이 자신을 소모할수록 더욱 힘을 얻게 됩니다. 하나님은 결코 내일 또는 다음 시간을 위해 힘을 주지 않으십니다. 단지 그 순간의 긴장을 위해 힘을 주실 뿐입니다. 유혹은 문제를 대할 때 상식으로 대하려 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어려움을 당할 때 큰 기쁨이 넘칩니다. 그 이유는 모든 사람들에게 불가능한 상황이 하나님께는 전혀 문제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7/29 "구름 속에서 예수님이 보이시나요? - Do You See Jesus in Your Clouds?" (계 1)

7/29  "구름 속에서 예수님이 보이시나요? - Do You See Jesus in Your Clouds?" (계 1)

성경에서 구름은 언제나 하나님과 관련됩니다. 구름은 하나님의 통치에 반항하는 듯한 우리 개인 생활의 안팎에서 일어나는 슬픔, 고통, 궁핍의 상황들입니다. 하나님의 영은 이 구름들을 통해 우리에게 어떻게 믿음으로 걸을 수 있는가를 가르치십니다. 만일 구름이 없다면 우리에게 믿음도 없을 것입니다.

7/28 "하나님의 목적인가, 나의 목적인가? - God’s Purpose or Mine?" (막 6)

7/28  "하나님의 목적인가, 나의 목적인가? - God’s Purpose or Mine?" (막 6)

우리가 ‘과정’이라고 부르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목적’이라고 부르십니다. 무엇이 하나님의 목적에 대한 나의 꿈입니까? 그분의 목적은 지금 내가 주님과 주의 능력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만일 요동 속에서 평안하고 당황하지 않을 수 있다면, 그것이 하나님의 목적의 성취입니다.

* 7/27 "지식으로 가는 길 - The Way to Knowledge" (요 7)

* 7/27  "지식으로 가는 길 - The Way to Knowledge" (요 7)

영적인 것을 이해하는 황금률은 지능이 아니라 순종입니다. 사람이 과학적인 지식을 원하면 지적 호기심이 그를 인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만일 그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것을 깨닫고자 한다면 오직 순종을 통해 얻을 수 있습니다. 만일 일들이 내게 힘들어 진다면 이는 분명히 순종하지 않으려는 뭔가가 있어서 그러합니다. 지적 어둠은 무지로부터 옵니다. 그러나 영적 어둠은 내 안에 순종하지 않으려는 뭔가가 있기 때문입니다.

7/26 "정결함으로 가는 길 - The Way to Purity" (마 15)

7/26  "정결함으로 가는 길 - The Way to Purity" (마 15)

내가 악당이라는 사실을 체험해보지 못했다면, 이는 겁 많은 소심함과 문명 생활의 보호 때문입니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 앞에서 벌거벗은 듯이 서게 될 때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간들을 향한 진단이 옳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성령께서 내 안에 들어오시면 그분은 개인의 삶의 중심부에 예수 그리스도의 삶 가운데서 드러나셨던 그 영으로 오시는 것입니다. 곧 성령만이 더러움이 전혀 없으신 완전한 청결이십니다.

7/25 "성령의 폭발적 능력 - Am I Blessed Like This?" (마 5)

7/25  "성령의 폭발적 능력 - Am I Blessed Like This?" (마 5)

산상수훈의 내용을 문자적으로 적용한다면 굳이 우리가 거듭날 필요는 없습니다. 성령께서 주의 말씀을 우리의 상황에 적용하시는 것처럼, 성령에 의해 주의 말씀을 해석하는 것은 성도들이 해야 할 엄중한 작업입니다. 산상수훈은 규범이나 율례가 아닙니다. 성령이 우리의 삶을 인도하실 때, 성령의 폭발적인 능력이 우리 삶에 나타나는 현상들을 진술한 것입니다.

* 7/24 "하나님의 본성과 우리의 동기 - His Nature and Our Motives" (마 5)

* 7/24  "하나님의 본성과 우리의 동기 - His Nature and Our Motives" (마 5)

예수님께서는 그분의 구속을 통해 누구에게든지 자신의 성향을 넣어주실 수 있고, 그를 갓난아기같이 순결하고 단순하게 만드실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순결은 만일 내가 주 안에서 재창조되지 않으면 불가능합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그분의 구속을 통해 착수하신 일입니다.

7/23 "거룩의 신비 - Sanctification (2)"

7/23  "거룩의 신비 - Sanctification (2)"

거룩한 삶의 경이로운 비밀은 예수님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완전함이 나의 부패한 육체를 통해 나타나는 것입니다. 거룩(성화)은 곧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이며, ‘예수님의 놀라운 생명’입니다. 이 생명은 하나님의 은혜의 주권적인 선물인데 믿음을 통해 우리에게 전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