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자와 양

목회자 칼럼 / 목자와 양

약속된 치료를 받기 위해서 한국에 왔습니다. 치료에 우선 순위를 두면서 짧은 일정을 소화하고 있습니다. 목사가 자리를 비웠지만 각자 맡은 자리를 잘 지키고 있는 워프가족들이 자랑스럽습니다. 오늘도 주님의 은혜안에서 풍성하고 은혜스로운 예배를 드리시기를 바랍니다.

지난 목요일에 저는 대학에서 같이 성경공부를 했던 한 형제를 만났습니다. 현재 그 형제는 A국에서 십수년을 선교사로 지내고 있습니다. 캠퍼에서 저는 그 형제의 '목자'이었습니다. '목자'와 '양'의 관계로 성경공부하고 서로를 위해 기도해 주던 사이었는데, 삼십년이 지나서 조국을 떠나 타국에서 복음을 붙잡고 살다가 다시 만났습니다.

형제와 교제하면서 선교현장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동안 기독교인이 수천명도 되지 않은 나라에서 몇몇 가정과 팀을 이루어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수고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또한 공개적으로 복음을 전할 수 없는 상황속에서 기회가 주어지면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애썻던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그동안 작은 한글학교의 교장으로 섬겼는데, 한류 열풍이 불어오면서 한글이 제2외국어로 지정되어, 인근에 있는 고등학교에서 한글을 가르치는 기회도 갖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저는 형제를 통하여 한므나를 받은 청지기가 열므나를 남긴 것과 같이 풍성히 열매를 거두었다는 이야기는 듣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제가 감사했던 것은 그 형제와 그 팀이 하나님 앞에서 참으로 신실하게 섬김을 다하고 있는 것이 었습니다. 또한 그동안 어려운 상황속에서 그 자리를 지켰을 뿐만 아니라 점점 더 어려워지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복음을 붙잡고 그 자리를 지켜내려는 마음을 갖고 있음을 보면서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저희가 만난 후 찾아간 곳은 상일동의 카페 에클레시아 였습니다. 그곳에서 우리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우리를 응원해 주는 분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내가 누군가의 목자가 되고, 그들은 나의 양이 될 뿐만 아니라, 다시 나의 동역자가 되고 나의 가족이 되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모습임을 경험하였습니다. *11/04/2017 최정섭

작은 채플 기도

목회자 칼럼 / 작은 채플안에서의 기도

지난 수요일 아침 날씨는 좀 쌀쌀했다. 누군가에게 들은 이야기가 기억나서, 잠시 보스톤 칼리지(BC)에 들렸다.  차에서 내려 처음 본 건물은 성 이그나티우스 교회였다. 혹시나 하고 교회 문을 열어 보았는데 굳게 닫혀 있었다. 잠시라도 들어가서 기도하고 싶었는데 그렇게 할 수 가 없었다.


교회를 지나 조금 더 가니 학교 이름이 크게 써져 있는 담을 따라 학교 안으로 이어져 있는 길에 잘 정돈된 단풍나무들이 멋있게 이어져 있었다. 학교 배치도를 살핀 후 도서관(O'neill Library)이 있는 건물을 찾으며 나도 학생들을 따라 움직였다. 처음 찾아 온 곳이기도 했지만, 왠지 걸을수록 낯선 기분이 더 들었다. 


그런데, 쌀쌀함을 피해 잠시 들어간 라운지의 문앞의 테이블에 우리 교회 청년이 열심히 수업을 준비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매우 낯선 곳이 었는데, 잠시 만나 형제를 통해 조금은 여유를 갖게 되었다. 도서관을 잠시 둘러 보았다. 그리고 발견한 것은 성 이그나티우스 로욜라의 동상이었다. Saint Ignatius Loyola (1491-1556), 카톨릭 예수회를 시작한 성인의 동상이다. BC는 예수회에 속한 대학이다. 

로욜라 동상이 서있는 학교는 나에게는 사실 낯설지 않다. 한국에서 30년전에 대학을 다니면서 아침마다 몇몇 학생들과 함께 말씀을 묵상하던 곳이 료욜라 동상앞의 야외 테이블이었었다. 카톨릭 예수회에 속한 대학은 학교의 외형뿐만 아니라 시스템까지도 나름대로의 짠짠함을 갖고 있다. 개교회를 지향하는 개신교의 입장에서 전체 교회가 한 시스템안에서 움직이는 카톨릭교회를 바라볼 때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어떤 짠짠함과 같은 것이다.


참으로 아이러니 하다. 세월이 30년이 지났는데 왠지 오늘 느끼는 감정은 이전에 느꼈던 감정과 많이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정말 하나님은 어떻게 일하고 계십니까?" "이 학교에 다니는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들을 온전하게 세워주십시오"

돌아오는 길에, 다시한번 처음에 문을 두르렸던 교회의 문을 열어보았다. 여전히 닫혀 있었다. 잠시라도 교회에 들어가서 기도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는데 그냥 가야하나 했다. 그런데 감사하게도 관리하는 분을 만나 지하에 있는 작은 채플에 들어갈 수 있었다. 30년전에 난 학교에 있는 작은 예배당에 종종 가곤 했었다. 그곳에서 나는 나에게 맡겨진 형제들을 위해 기도했었다. 그 기억을 되살리면서, 나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주님앞에 지금 주님께서 나에게 부탁하신 영혼들을 위해 기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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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의 세가지 속성

목회자 칼럼 / 복음의 세가지 속성


*복음에 대한 깊은 이해가 매우 중요하다 여겨 아래 내용을 소개합니다. 우리 개인과 교회 공동체가 복음의 깊이와 넓이와 높이와 길이를 잘 이해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복음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갖고 있다.

"하나님의 아들은 자신을 비워 예수 그리스도로 세상에 오셨으며 친히 종이 되셨다.

그분은 십자가에서 대속의 희생 제물로 죽으셨다.

그분은 새로워질 만물의 첫 열매로서 무덤에서 일어나셨다." (Simon Ganhercole)


'위에서 아래로 임함' (Upside-Down), 성육신

복음 안에서 가치의 역전이 일어난다. 예수님의 나라에서는 가난한 사람, 슬픈 사람, 압제 받는 사람이 부자와 유명한 사람들, 교만한 사람들 보다위에 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부유하셨지만 가난하게 되셨고, 그분은 왕이셨느나 섬기셨고, 권력을 강화시켜서가 아니라 자신을 희생하셔서 죄에 대해서 승리하셨다. 예수님은 모든 것을 잃으므로 모든 것을 얻으셨다. 예수님은 이러한 가치관을 가지고 새로운 종류의 섬김 공동체를 창조하셨다.


'안에서 바깥으로 임함' (Inside-Out), 속죄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대신하심으로 구원을 완성하셨다. 이 구원은 값진 선물이다. 하나님이 나를 받아주시고 은혜로 값없이 사랑하셨음을 깨닫게 된다면, 비로소 내면의 기쁨과 감사로 그 분께 순종하는 삶을 시작할 수 있다. 종교는 바깥에서 우리 내면을 강요하는 것이라면, 복음은 우리 안에서 바깥으로 솟아나오는 것이다. 우리는 뭔가를 해서가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 때문에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답고 의로운 사람이 된다는 사실을 내면 깊이 이해하게 되면 하나님과의 관계, 자기 자신과의 관계,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 혁명적인 변화가 일어나게 된다.


'미래를 앞서 경험함' (Forward-Back), 부활

예수님은 부활하셨고, 예수님의 부활로 하나님 나라가 출범했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부활하지 않았고,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는 완전하게 임하지 않았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온전히 세워질 것이고, 주님은 만물을 새롭게 하시고 물질세계의 모든 망가진 것들을 깨끗게 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다가올 미래를 생각하며 산다.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돕고, 문화의 창조자로 살아간다.                        (출처 : 팀켈러의 센터쳐치)




무너짐 경험

목회자 칼럼 / 냉담함과 무너짐을 경험하면서 가는 길


메마름과 냉담, 무너짐과 공허가 가득차 있고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부재를 경험하는  '영혼의 어두운 밤(the dark night of the soul)'을 통해서 우리는 집착과 중독을 제거하는 영적 회복을 경험하게 된다. 인도 캘커타에서 45년간 사랑의 선교회를 세워  빈민, 병자, 고아, 그리고 죽어가는 사람들을 섬겼던 마더 테레사는 97년 노벨상을 받는다. 그런데, 이 상을 수상하기 몇개월 전에 그의 친구에게 다음과 같은 고백을 한다.

"예수님은 당신을 특별히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나 나에게는 침묵과 공허함이 너무 커서 보려고 해도 보지 못하고, 들으려고 해도 들리지 않으며 기도 할 때 혀를 놀려도 말이 나오지 않습니다." 이것은 그녀의 삶에 있었던 "영혼의 어두운 밤"을 이야기한 것이다. 세상에서 존경받는 인물이었지만, 그녀의 내면에는 하나님의 존재를 느끼지 못한 채, 건조함, 냉담함 , 어둠, 외로움, 무너짐, 고통 등이 수십년 가득차 있었던 것이다.

수많은 영혼들을 섬겼던 '마더' 즉 '그 어머니'도 그랬다면 과연 지금 영혼을 돌보는 귀한 부름에 응답하며 그 길을 가기 시작한  목자들의 삶은 어떨까요? 나에게 있었던 지난 시간들을 돌아본다면, 목자의 삶에도 마더 테레사가 경험하며 고백했던 '영혼의 어두운 밤'이 반드시 주어질 것이다.

영혼을 돌보는 목자의 삶에도 '하나님 앞에서의 냉담함과 무너짐'의 때가 나타난다. 하나님과 그분의 성품과 그분의 인도하심을 경험하지 못하면서 고통을 느끼게 된다. 또한, 목자는 그러한 상태를 겪고 있음에도, '목자에게 맡겨진 양들'을 꾸준히 돌보고 섬겨야 한다는 것이다. 어두움 속에서 불안하고 건조한 목자가 어떻게 양들을 먹이며 인도할 수 있다는 말인가?  뿐만 아니라, '영혼의 어두운 밤'을 겪는 목자들에게는 종종 그러한 상태를 나눌 수 있는 대상을 찾기가 어렵다. 예를 들어서, 담임목사나 부모가 자신의 영적인 상태를 성도나 자녀에게 있는 그대로 이야기할 수는 없는 것이다. 사람에게 이야기 할 수 없기에 더욱더 마음 깊은 곳에서 오직 주님만 바라볼 수 밖에 없게 된다.

테레사의 삶에서 발견하는 교훈은 주님앞에서 목자로 살아가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매우 유익한 지혜가 된다.  그녀가 50년이상 '영혼의 어두운 밤'을 겪으며 살아왔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마더'로 또는 '목자'로 신실하게 그 자리를 지키며 살아왔다는 것이다.  어두운 밤을 지나는 그 때는 참으로 불안하고 부정적인 마음을 갖게 되지만, 하나님의 변함없고 신실한 사랑을 새롭게 깨닫게 되면 하나님의 열정적인 사랑에 온전히 반응하게 된다. 그리하여 진정한 감사와 사랑의 노래를 하게 된다.    *최정섭 10-14-2018






행복, 행위언어

‘행복은 행위언어이다'

시편 1편에는 “복 있는 사람"에 대하여 표현이 있다. 최근에 번역된 “생생한 우리말로 푼 시편"에서  시편1편은 “이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가"로 시작된다. 행복이란 과연 어떤 것일까? 시편1편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행복을 알아보자.

친절하게도 이 번역본에는 중요한 단어에 대한 설명을 달아놓았다. 아래에 옮겨본다.

  • 행복 : 동사<에쉐르> 명사<아샤르>

[이 단어의 기본 말뜻은 ‘곧다'는 말이다. 이 시편에서는 ‘평탄하다' ‘앞으로 가다' ‘똑바로 가다' ‘계속해서 가다' ‘전진하다' ‘번창하다'는 말뜻으로 확장된다. 흔히 ‘생활에서 충분한 만족과 기쁨을 느끼는 상태'라고 알고 있는 ‘행복'을 히브리어에서는 <곧게 걸어 나가다>는 행위언어로 이야기 한다. 행복을 ’삶을 진행하는 태도’로 이해한다면 누구나 행복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 행복은 삶을 사는 길이요 태도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끝없이 영원으로 이어지는 길로 말이다. ]

“행복은 ‘삶을 곧게 걸어 나아가는’ 태도를 말하는 행위 언어이다." 이렇게 정의를 내려보니, 좀더 삶에 대하여 용기가 생긴다. 내가 원하는 어떤 상태에 다다르지 못하거나 그 상태에서 이탈하면 행복하지 않다라고 여겼던 적이 많기 때문이다.

우리는 종종 이렇게 말한다. ‘사는 이유를 잘 찾았다고 여겨서 열심을 내어 살아왔다.’ 그런데 ‘그 이유'가 물거품 처럼 사라지는 고통과 어려움을 경험 할 때가 있지 않은가? 그렇게 되면 삶은 참혹하게 변한다. 그러나 반대로 생각을 해 볼 수 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살 이유를 찾기 위해 살아간다.' 시편에서 알려주고 있는 <곧게 걸어 나아가는 태도>로 살아가면 ‘살 이유'를 계속 찾게 될 것이다. *10-7-2018 / 최정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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