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소식전합니다. 

October 29, 2017

모두 안녕하신지요? 저는 한국에서 잘 지내고 있습니다. 

여러분  한분 한분이 생각나고 눈에 선합니다. 

이곳에서 생각하는 우리 워프 교회가 더 귀하게 느껴지고, 한분 한분이 더 소중하게만 여겨집니다. 

어떻게 이렇게 순수하고 아름다운 분들을 우리 교회에 보내주셨는지 생각하며, 멀리서 감사와 기도를 드립니다. 

감사 제목입니다. 저의 어머님께서는 건강이 많이 좋아지셨습니다. 수술후 어려운 시간을 잘 극복하셨고, 이제는 먹는것도 잘 드시고 계십니다. 제가 도착했을때 보다 얼굴색도, 움직임도 훨씬 좋아지신 모습이라서, 얼마나 감사한지모르겠습니다. 다 여러분의 기도 덕분인 것 같습니다. 기도해주신 많은 분들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저는 틈틈히 시간을 내어, 찬양집회와 교회예배에 참석할 뿐 아니라, 사람들을 만나는 기회들도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까지 만난 사람들의 수를 세어보니, 무려 40여명이나 되더군요. 연락이 끊긴지도 참 오랜 시간이 지났음데도 불구하고, 다시 연결되었다는 사실 자체만해도 신기하고 감사하기만 합니다. 특별히 오늘은 우리와 보스톤에서 함께 믿음의 생활을 했던 워프식구들을 만났습니다. 다들 바쁜 생활 가운데, 저를 만나기 위해서 멀리서 시간을 내어 온 청년들을 만나니, 얼마나 기쁘고 좋았는지 모릅니다. 그동안 한국에 정착하면서 치열하게 살았던 형제자매들의 삶의 스토리를 들으며, 그동안 참 수고 많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짦은 시간이었지만, 한국에 정착하면서 느낀 어려움들을 나누며, 보스톤과 워프를 그리워하는 지체들이 얼마나 많은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성공과 성취를 지향하는 한국사회에서 뒤처지지 않기 위해 치열하게 살아가는 청년들에게, 저는 예배 열정의 회복과, 참된 예배자의 자리로 들어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나누었습니다. 그 무엇보다 예배의 회복이야 말로 우상에 쩌든 사회에서 살아남는 영적 비결임을 나누며, 우리 워프가 주님앞에 그렇게 사용되기를 소망합니다. 

내일은 워프 출신 박수진 찬양사역자가 음반발매 기념 컨서트를 한다고 하네요. 축하와 격려를 위해서 참여할 계획인데, 거기 가면, 또다른 워프 식구들을 만날 수 있을 것 같네요. 

보든 분들에게 주님의 깊은 평화가 임하고, 오늘도 살아계신 주님을 경험하는 예배가 되시길 기도하겠습니다.

행함없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을까요?

October 22, 2017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하여, 서충원목사(총신대 조직신학 Th.M, 숭실대 Ph.D, 전 서울신대 교수, 현 샬롬누리영광교회 담임목사)의 글을 나눕니다.>

행함 없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말하는 이들은 성경을 부정하는 사람들입니다. 행함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고 구원에 이르게 하지 못합니다. 한국교회에 이런 죽은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잘못된 구원론이 퍼져 있지만 이것은 종교개혁자들에 대한 전적인 오해입니다. 

종교개혁자들은 행함 없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선행의 공로로 구원을 얻는다는 가톨릭의 공로사상을 부정한 것입니다. 선행의 공로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부정입니다. 이런 자기 의에 대한 비판입니다. 

그러나 자기 의에 대한 비판이 반동으로 나아가서 '행함은 구원과 상관없고 단지 믿음뿐이다' 라고 생각한다면 이것은 믿음과 행함을 분리시키는 것이고, 이것은 야고보서의 말씀,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라는 말씀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구원하는 믿음은 행함 있는 믿음이고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갈 5:6)입니다. 

본래 바울과 야고보는 서로 모순되는 진리를 말하지 않았습니다. 사실상 루터와 칼빈이 율법의 행위로 구원을 얻지 못한다는 바울의 말을 선행으로 구원을 얻지 못한다고 말함으로써 야고보와 바울이 모순되는 것처럼 오해하게 만든 큰 책임이 있습니다. 바울에게 율법의 행위란 율법을 준수하는 행위가 아니었습니다. 할례나 안식일과 같은 행위였습니다. 할례나 안식일을 자랑하면서도 실상 율법을 준수하지 않는 유대주의자들을 바울은 비판한 것이지 행함 없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말한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새 관점주의자 제임스 던이나 톰 라이트의 입장이 옳습니다. 

바울의 의도는 할례가 중요하지 않고 행함 있는 믿음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갈 5:6)." "할례를 받은 그들이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하려는 것은 그들이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라(갈 6:13)." 바울은 행함과 믿음을 대조시킨 것이 아니라 할례와 행함 있는 믿음을 대조시켰습니다. 

공로사상은 사실상 행함없는 믿음입니다. 공로란 진정한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이 아닙니다. 공로를 주장하는 가톨릭 신학자들은 겉으로 보면 행함 없는 믿음과 정반대의 자리에 있는 것 같아도 바리새인들처럼 행함 없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행함은 주님이 원하시는 그런 행함 성령의 열매가 아닌 육체적인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들은 단지 종교적인 행위를 한 것이지 야고보가 말한 행위를 한 것이 아닙니다. 

살아있는 믿음이 행함이 없다는 것은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가 없다는 것처럼 모순된 말입니다. 오늘날 비도덕적인 행위를 정당화하며 행함없는 믿음으로 구원 얻는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다 거짓말하는 이들입니다. 행함없는 이들은 다 심판에 이릅니다.

과학과 신앙 (최영기 국제가사원장)

October 15, 2017

최근 한국에서 크리스천 중소기업진흥장관 후보자가 창조과학회 이사라는 사실을 갖고 언론이 법석을 떨자 이사직을 사퇴했고, 이를 계기로 ‘창조과학’에 관한 논란이 벌어지고 있는 모양입니다.

제 전공 분야가 아니라서 조심스럽기는 하지만, 이공학박사 학위를 취득하는 가운데 실험 결과에서 합리적인 결론을 끌어내는 훈련도 받았고, 창세기의 기록이 설화인지 사실인지 고민도 해 보았고, 찰스 다윈이 저술한 ‘종의 기원’을 비롯하여 진화론에 관한 다양한 책을 읽었기 때문에, 동의하지 않는 분들이 있겠지만 제 소견을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지식인들은 진화론에 동의하지 않으면 무지한 사람으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진화론은 법칙이 아니고 마지막 글자 ‘론(論)’이 의미하듯이 하나의 이론입니다. 엄격한 의미에서 과학(science)이란 자연 현상을 관찰하여 그런 현상 뒤에 있는 법칙을 발견하는 학문입니다. 현상을 설명하는 이론(theory)을 먼저 만들고 이 이론에 어긋나는 예가 하나도 없다고 확증이 될 때 법칙(law)이라고 부릅니다. (만유인력론이라고 안 하고 만유인력법칙이라고 부르는 이유)

진화론은 생물체의 화석을 통하여 생명의 근원과 발전을 설명하는 하나의 이론 체계입니다. 실험을 통해 진위 여부를 가릴 수 없음으로 엄격한 의미의 과학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진화론을 과학이라고 한다면, 창조론도 과학이 될 수 있다고 창조과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입니다. (사실 화석이나 지층을 설명하는 데에는 진화론자들보다 노아의 홍수로 설명하는 창조과학자들이 더 설득력이 있습니다.)

진화론자들은 만물이 무기물에서 유기물로, 하등동물에서 고등동물로 자연적으로 진화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자연 상태에서 사물은 퇴화하지, 진화하지 않습니다. 방치된 건물은 쇠락합니다. 꽃을 꺾어 두면 시듭니다. 물을 담은 꽃병에 넣어, 햇빛을 비춰주고, 자양분을 공급해 줄 때 꽃이 살아납니다. 진화가 일어나기 위해서는 우발적이 아닌, 의도적이고, 조직적이고, 지적인 외부의 힘이 필요합니다. 크리스천 과학자들은 이 창조의 힘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고 믿습니다.

진화론자들은 오랜 세월 가운데 저절로 단세포 생물이 생겨나서 다세포 생물로 진화하고, 물고기, 양서류, 포유동물로 진화했다고 주장하지만, 최근 유전학자들의 발견에 비추어보면 이런 주장은 정당화가 안 됩니다. 유전자에는 천문학적인 숫자의 정보가 담겨져 있습니다. 이 정보 중에는 환경에 적응하게 만드는 것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찰스 다윈이 관찰한 대로 새가 환경에 따라 여러 모양으로 변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 종(species)의 생물이 다른 종의 생물로 변하게 만드는 유전자는 발견할 수가 없습니다. 늑대가 진돗개, 불독, 치와와가 되는 것은 가능하지만(소진화 microevolution), 늑대가 코끼리가 될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대진화 macroevolution). 천문학 숫자의 유전자 고리의  DNA 위치가 하나만 변해도 태아가 기형아가 될 수 있습니다. 한 종의 생물이 다른 종의 생물로 진화하기 위해서는 유전자에 포함된 수많은 정보가 정확하게 동시에 바뀌어야 하는데, 이런 일이 자연적으로 일어날 확률은 0입니다.

크리스천 과학자들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사실에 모두 동의합니다. 그러나 자연계의 생성 과정에는 이견이 존재합니다. 물리세계가 하나님이 만드신 물리 법칙에 지배 받듯이 생물세계도 하나님이 만드신 진화 법칙에 지배 받는다는 의견으로부터, ‘창조과학자’들처럼 자연세계는 성경에 읽히는 그대로 만들어졌다는 주장까지 다양합니다.

저는 ‘창조과학자’들의 주장에 대부분 동의하지만, 전적으로 못합니다. 성경해석 방법 때문입니다. 성경 해석은 기록한 사람의 의도를 발견하는 것이 목표가 되어야 하는데, 이들에게는 저자의 의도와 상관없이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지구의 나이가 6,000년이라고 주장하는데, 이것은 창세기 1장에 기록된 하루를 24시간으로 계산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창세기 기자가 ‘하루’라고 적었을 때에 24시간을 염두에 두었을지는 의문입니다.

저는 과학이 발전하면 발전할수록 성경이 진리라는 것을 증명해 준다고 믿습니다. 창세기 1장1절은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천지만물을 지으셨다고 말합니다. 오늘날 우주 기원에 대한 정설로 받아 드려지고 있는 우주대폭발(Big Bang) 이론은 우주가 과거 한 시점에 거대한 힘에 의해서 순간적으로 생겨났고, 바람을 불어 넣는 풍선처럼 팽창해 가고 있다고 설명합니다. 이 이론은 다양한 측정을 통하여 사실로 확인되고 있습니다. 저는 이것이 창세기 1장 1절을 설명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문명의 창조 설화에서는 신이 자연세계를 만들 때 재료를 사용했습니다. 무로부터 천지가 창조되었다는 것은 인간의 사고로 생각해 낼 수 있는 발상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과학과 신학은 적대 관계가 아니라 상호 보완 관계입니다. 그러므로 과학 이론이 성경의 진리와 상치될 때에는 그 이론이 잘못된 가정 위에 세워지지 않았는지 살펴야 합니다. 성경이 과학적인 사실과 상치될 때에는, 성경을 잘못 해석하고 있지 않은지 살펴야 합니다.

성경의 진리에 배치되는 과학 이론도 안 되고, 과학적인 사실을 부인하는 성경 해석도 안됩니다